르 블랑 칸쿤 두번째 날

코코아 14 views

전날 밤, AI한테 먼저 물어봤다.

칸쿤 르 블랑 체크인 당일, 프런트에서 프로모션을 권유받았다. “내일 아침 멤버십 설명회에 참석하면 스파 크레딧과 기타 혜택을 드리겠다”는 조건이었다. 솔직히 내키지 않았지만 크레딧이 탐나서 일단 OK 했다.

그날 밤 AI에게 물었다. “르 블랑 칸쿤에서 권유하는 세미나, 들을 만한가요?”

답은 명쾌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굳이 들을 필요 없다고 했다. 르 블랑 같은 리조트에서 하는 세미나는 거의 100% 타임쉐어 또는 Palace Elite 멤버십 판매 설명회라는 것. 리조트의 핵심 수익 채널이며, “90분”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더 길어지는 경우가 많고, 스파 크레딧이나 투어 같은 혜택으로 참석을 유도한다고 했다.

세일즈 방식도 전형적이라고 했다. 담당자 한 명이 시작해서 팀장, 매니저가 단계적으로 등장하는 압박 구조. “오늘만 가능한 딜”을 반복 강조하고,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티를 내면 계속 붙잡는다고. 많은 사람들이 충동적으로 계약하고 나중에 후회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다만 예외는 있다고 했다. 이미 구매 의사가 있거나, 협상·거절에 자신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대부분 비추천이라고 했다. 다만 혜택만 챙기고 싶다면 한 번 가볼 만하다고 조언했다.

나는 혜택(특히 크레딧)이 탐나서 결국 가보기로 했다. 그래서 두 번째 질문을 던졌다. “그럼 혜택만 받고 최대한 빨리 빠져나오는 방법은?”

AI가 알려준 핵심 전략은 간단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절대 안 산다”는 포지션을 유지할 것. 시작 전에 시간 제한을 분명히 선언할 것(“We only have 90 minutes. We have a reservation after.”). 설명 중에는 “It’s nice” 정도의 중립 반응만 하고, “I love it” 같은 긍정 표현은 절대 피할 것. 가격 이야기가 나오면 “We don’t make financial decisions on vacation”이 잘 먹힌다고 했다. 매니저가 나와도 이유를 길게 설명하지 말고 “No, thank you”를 짧게 반복하는 게 가장 강력하다고.

한 줄 요약: 단호하게, 짧게, 반복.

8시 45분, 6층으로

아침 일찍 눈을 뜨고 AI가 알려준 내용을 다시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오늘 작전은 이미 세워놓은 상태였다. 영어를 제일 잘하는 아들이 모든 대화를 맡고, 나는 영어를 더 못하는 척하며 관심 없는 티를 내기로 했다. 아들에게도 미리 “무슨 일이 있어도 거절하자”고 못 박아두었다.

8시 45분에 6층에 올라가니 30대 여성 담당 직원이 밝고 친절하게 나왔다. 전날 프런트에서 미리 들은 대로, 총 1시간 30분 중 약 1시간은 1층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아침을 함께 먹으며 프레젠테이션을 듣는 시간이었다.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의 아침

레스토랑에서의 아침 식사는 생각보다 편안한 분위기였지만, 내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마치 부모님 등쌀에 억지로 떠밀려서 나온 맞선 자리 같았다.  직원은 태블릿으로 멤버십 설명을 이어갔지만, 강한 압박은 없었다. 그냥 “이런 혜택이 있어요” 하는 일반적인 상품 소개 느낌이었다.

특이한 점은 가격에 대해선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어봐도 “그건 나중에 매니저와 이야기하시면 돼요”라는 답변만 돌아왔다. 이 단계의 목표는 가격 전에 먼저 회원권의 ‘가치’를 심어주는 것이었다.

아들이 주로 대화를 이끌었고, 나는 영어를 못 알아듣는 척하며 관심 없는 티를 좀 과하게 냈다. 지금 생각하면 영업사원 입장에서 기분이 좋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 자연스럽게 친절하게 응대하는 아들하고만 대화가 이어졌다. 작전은 먹혔지만, 내가 의도보다 조금 무례하게 행동한 것 같아 살짝 찜찜했다.

6층으로 다시 — 여기서부터는 자동차 딜이었다

아침 식사가 끝나고 다시 6층으로 올라가자 분위기가 180도 바뀌었다. 레스토랑에서의 소개팅 같은 어색함은 사라지고, 이제는 본격적인 자동차 딜러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세일즈 직원은 4가지 플랜을 보여줬다. 가장 싼 플랜이 13만 불, 가장 비싼 플랜이 150만 불이었다. 아들과 상담하면서 주로 13만 불짜리 플랜에 포커스해서 설명하고 딜을 진행했다. 우리가 관심 없다는 반응을 보이자 팀장이 나타나 가격을 내렸다. 계속 거절하니 매니저, 그리고 매니저의 매니저까지 차례로 등장했다. 각자 “오늘만 가능한 조건”이라는 말을 붙이며 선심 쓰듯 가격을 깎았다. 최종 제안은 6,800달러.

솔직히 그 순간 잠깐 흔들렸다. 13만 불에서 6,800달러까지 내려오니 얼핏 ‘굉장한 딜’처럼 보였다. 이게 바로 앵커링 효과다. 알면서도 순간적으로 마음이 움직이는 게 무서웠다.

계약서 없는 협상 — 내가 거절한 진짜 이유

나는 어떤 계약이든 계약서를 먼저 꼼꼼히 읽고, 파인프린트까지 확인한 뒤 사인하는 타입이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는 협상이 끝날 때까지 계약서를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다. 모든 설명이 구두로만 이뤄졌다.

자동차 계약과 비교하면 차이가 분명했다. 자동차는 사전에 주변 지인에게 물어보거나 인터넷으로 정보를 어느 정도 모을 수 있고, 가격 범위도 대략 예측이 가능하다. 하지만 이 멤버십 계약은 정보가 너무 제한되어 있었다. 실제 비용 구조, 연회비, 유지비, 해지 조건, 양도 제한 등 중요한 내용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를 미리 얻기 매우 어려웠다.

설령 마지막에 계약서를 보여준다고 해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타임쉐어 계약서는 보통 수십 페이지 분량이다. 이미 “OK” 분위기에서 그걸 한 장 한 장 제대로 검토할 수 있을까? 현실적으로 어렵다. “여기 사인하세요, 여기도요, 이건 표준 약관이에요” 하며 빠르게 넘기면, 내가 정확히 무엇에 서명하는지 파악하기 전에 끝날 수 있다.

자동차 딜러에서 늘 느꼈던 그 찝찝함이 여기서도 그대로였고, 오히려 정보 부족 때문에 더 불안했다. 미리 계약서를 달라고 해서 숙소에서 읽어보겠다고 하면 “오늘만 가능한 조건”이 사라진다. 결국 이 딜 방식 자체가 나와 맞지 않았다. 6,800달러가 나쁜 가격이 아니었을 수도 있지만, 그게 정말 좋은 딜인지 압박 없이 충분히 검토할 환경이 처음부터 주어지지 않았다.

아들이 깔끔하게 거절했다. 다행히 약속한 1시간 30분을 거의 지켜주었고, 거절 의사가 명확해지자 더 이상 붙잡지 않았다. 크레딧을 챙기고 내려왔다.

거절 후의 오전 — 물의 시간, 그리고 리조트 크레딧의 현실

내려오자마자 프로모션으로 받은 리조트 크레딧을 활용했다. 아들은 12시 30분 마사지를, 우리는 목요일 2시 마사지를 예약하고, 남은 크레딧으로 골프 레슨도 잡았다.

그리고 올인클루시브에 포함된 하이드로테라피를 받으러 갔다. 사우나(10분) → 얼음방(젤+얼음 5분) → 스팀방(5분) → 샤워 → 자쿠지·냉탕·온탕 → 온돌침대 두피 마사지까지 풀코스였다. 직원이 시간마다 정확히 와서 다음 코스로 안내해주고, 중간에 시원한 차도 가져다주며 세세하게 가이드해줘서 시설 자체는 정말 좋았다. 이런 스파급 시설이 올인클루시브에 포함되어 있다는 게 신기했다.

다만 솔직히 직원이 계속 따라다니며 안내해주는 시스템은 내 취향과는 조금 맞지 않았다. 혼자 천천히 여유롭게 즐기고 싶은데, 누가 자꾸 시간을 재고 데리러 오는 느낌이라 부담스러웠다. 아내는 여성 시설에서 나보다 훨씬 오래 머물렀는데, 아마 여성 쪽 분위기가 더 편안했을지도 모르겠다.

(참고로 아들이 전에 갔던 질랄라에서도 처음 방문했을 때는 비슷하게 직원이 따라다니며 안내했다고 하더라. 두 번째 방문부터는 덜 쫓아다닐지도 모르겠다.)

다만 리조트 크레딧을 실제로 쓰려고 보니 기대만큼 편하지 않았다. 액티비티 대부분이 1인당 300크레딧 이상으로 세팅되어 있어서 오버프라이스 느낌이 강했다. 크레딧이 조금 부족하면 사용이 제한되는 경우가 많았고, 부족한 크레딧을 현금으로 메우려면 1크레딧당 1달러를 내야 했다.

기프트샵에서는 남은 크레딧을 사용할 수 있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가방, 모자, 향수 등 일부 제품에만 적용됐고 가장 싼 물건이 109크레딧부터였다. 그 이하로 잔액이 남으면 그냥 사라지는 구조였다. 게다가 기프트샵 물건 가격이 관광지답게 비쌌다. 작은 치약 하나에 20불, 일회용 면도기 2개에 12불 정도였고, 다른 물건들도 비슷한 수준이었다. 결국 “공짜 혜택”처럼 느껴졌지만 실제로는 자유롭게 쓰기 어렵고, 부족분을 현금으로 채우는 비용까지 고려하면 생각보다 가치가 크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오후, 그리고 저녁 — 야마에서의 와규

아들 마사지가 끝난 건 2시 반쯤이었다. 늦은 점심이라 적게 먹어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부페 레스토랑에 가서 이것저것 먹다 보니 본의 아니게 과식하고 말았다. 아침 부페에는 오믈렛이 있었고 점심에는 철판구이가 있었지만, 나는 그보다는 다른 메뉴들을 주로 골라 먹었다.

풀에 들어갔더니 속이 좋지 않았다. 잠시 쉬고 나서 괜찮아졌고, 이후 5시까지 가족과 함께 풀장에서 놀았다. 저녁 식사는 수영복 차림으로 입장이 안 되기 때문에 방에 올라와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고 내려갔다.

저녁 6시, 일식당 야마(Yama). 지금까지 르 블랑에서 먹어본 식당 중 가장 좋았다. 특히 A4 와규 이시야끼가 메인 요리였는데, 주방에서 뜨겁게 달군 철판을 직접 가져와 그 위에서 얇게 저민 소고기 6점을 구워 먹는 방식이었다. 맛은 정말 좋았지만, 메인 요리로서는 양이 너무 적어서 아쉬웠다. 철판이 식기 전에 먹어야 하는 구조라 양이 많을 수 없다는 건 이해하지만, 올인클루시브니까 하나 더 시켰어야 했는데 하는 후회가 들었다.

니기리 중에서는 A4 와규 니기리와 장어 니기리가 토치로 즉석에서 구워주는 스타일이었는데, 둘 다 상당히 맛있었다. 디저트도 꽤 좋았다.

아들은 토로 사시미를 시키면서 “토로를 이렇게 무제한으로 먹는 건 정말 어메이징하다”며 크게 좋아했다. 그 모습을 보니 가족 여행의 작은 행복이 느껴졌다.

사시미는 전체적으로 신선했고, 니기리나 롤은 밥이 조금 아쉬운 느낌이었다. 전체적으로 고급스러운 분위기였지만, 솔직히 2년 전 질랄라(Zilara)에서 먹었던 양념 치킨 구이가 훨씬 더 강렬하게 기억에 남는다. 질랄라의 다른 음식들은 대부분 맛이 별로였는데, 풀장 옆에서 2~3일에 한 번, 점심시간에만 나오는 그 양념 치킨은 정말 환상적이었다. 야마의 와규보다도 그 치킨이 더 자주 생각날 정도다. 질랄라 가시는 분들은 점심시간에 풀장 쪽을 잘 확인해보시길. 놓치면 정말 아까운 맛이다.

저녁 후 가족끼리 이야기하다가 함께 헬스장으로 내려가 운동했다. 오늘도 우리 가족만 있었는데, 끝날 무렵 다른 가족이 들어왔다.

오늘 하루를 돌아보며

거절로 시작한 하루였다.

타임쉐어 영업은 AI 예측과 완전히 같진 않았다.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는 소개팅에서 거절 고민을 하며 식사하는 듯한 어색함이 있었고, 6층으로 올라간 후에는 전형적인 자동차 딜러 분위기로 바뀌었다. 단계적 매니저 등장, 점점 내려오는 숫자, “오늘만 가능”이라는 말.

6,800달러가 나쁜 딜은 아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정보가 너무 제한된 상황에서 구두 설명만으로 결정해야 하는 구조가 나와 맞지 않았다. 나는 그런 방식으로 계약하지 않는다.

그래도 하루는 알찼다. 크레딧으로 마사지와 골프 레슨을 예약하고, 하이드로테라피 풀코스를 즐겼으며(직원 안내 시스템은 조금 부담스러웠지만), 풀장에서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야마에서 와규 이시야끼와 토로 사시미를 맛봤다. 다만 리조트 크레딧의 실제 사용 편의성과 가치는 기대만큼 좋지 않았다.

거절로 시작해서 와규로 끝난 하루. 나쁘지 않았다.

👍 0

Comments (0)